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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도시적 규모와 개별 주택의 섬세함, 장중한 통일성과 역동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구현했다.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명품 집합주택, 카를 바이트 호프 빈에서 카를 마르크스 호프에 버금가는 기마인데 배우를 하나만 꼽는다면 당연히 '카를 바이트 호프 Karl Seite Hof, 1926-193/'이다. 붉은 빈의 두 번째 시장인 카를 바이트 Karl Spitz의 이름을 딴 이 건물은 1,700호의 주택을 수용하며 '도시 속의 도시'라는 개념을 실현하고 있다. 빈의 제21구인 풀 로리츠도르프 Floridsdor는 원래 도나우강 북부의 공업지대였는데 사회주의 정부에서 이곳을 새로운 주거지로 바꾸었다. 정부에서는 작은 규모의 집합주택을 여러 채 건설하려던 원래 계획을 바꿔 하나의 거대한 블록을 건설함으로써 새로운 지구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현상설계에서는 후 베르트랑 게스너의 안이 채택됐다. 게스너는 이 건물이 “결코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 workers colony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13 게스너의 모델은 왕궁이었다. 그의 계획안은 고트프리트 젬퍼 Gottfried Sempre가 설계한 합스부르크가 家의 새로운 궁전 호프부르크 Homburg 왕궁의 초기 구상안과 많이 닮아 있었다. 도판 23 젬퍼는 헬 덴 광장 Heldenplatz을 중심으로 2개의 반원 곡선형 건물이 서로 마주하는, 강한 바로크적 구성을 제안했으나 실제로는 절반만 실현되었다. 게스너가 계획한 카를 바이트 호프 또한 젬퍼가 구상 한 궁전과 마찬가지로 2개의 반원 곡선형 건물이 광장과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구상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하나의 반원 곡선형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는 구성으로 마감되었다. 게스너의 구상이 그대로 실현되었더라면 카를 바이트 호프는 카를 마르크스 호프를 뛰어넘는 빈의 명물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종적으로 실현된 카를 자이 초 호프 또한 상징성과 실용성이 교묘하게 섞인 건물로써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특별한 집합주택이 되었다. 카를 바이트 호프의 핵심은 동쪽에 자리하는 거대한 반원형 광장이다. 바로크풍의 이 광장에는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중앙의 아치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2개씩 작은 아치문이 설치되었다. 도 판 24 강력한 좌우 대칭의 구성이다. 건축가는 대칭의 균형에 약간의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 광장 북쪽에 높은 시계탑을 세웠다. 중앙의 아치문을 들어서면 동서를 가로지르는 선형 線形 광장이 자리하는데, 건축가는 이곳을 시장의 기능을 하는 공공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시장형 광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단지를 이루는 대다수 주동이 선형 광장과 직각을 이루게 배열됐다. 도판 25 건축가는 주민들이 주택으로 진입할 때도 주로 이 선형 광장을 통하게 했다. 커뮤니티의 중심공간이 되도록 한 것이다. “결코 집단거주지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게스너의 의도는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게스너는 카를 마르크스 호프에서 카를 엔이 한 것처럼 건물에 강력한 상징성과 장중한 힘을 부여했다. 따라서 두 건물은 규모, 공간구성, 섬세함, 장식체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하다. 다른 점은 카를 마르크스 호프처럼 건물에 색채를 많이 쓰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밝은 회색을 유지하면서 요소요소에만 악센트로 색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점은 도시 내에서의 역할과 관련된다. 이 건물은 블록의 경계를 넘어서 도시와의 공간적 관계를 과장되게 추구하지 않는다. 즉 카를 마르크스 호프처럼 도시의 대문이나 개방된 장벽'의 역할을 하지 않고, 블록의 완결성을 추구하면서 도시의 여러 중심 중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구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빈 공공주택사업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빈의 공공주택사업은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주거단지 건설과 여러 측면에서 비교된다. 도시의 중심부나 가까운 외곽에 자리했으므로 접근성 측면에서 유리했기에 거주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접근성이 떨어졌던 독일의 주거단지들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하지만 건축적인 측면에 서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논리적이고 통일된 계획 개념이 모자랐고, 건축기술에 진보성이 없었으며, 내부의 공간구성도 혁신적이지 못했다. 빈의 모델은 기존의 도시조직에 순응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전통에서 파생된 장식과 모티프를 사용했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공간'과 '새로운 미학'이 주류를 이루던 독일과 네덜란드의 주택건설사업과 비교했을 때 건축유형과 건축기술의 측면에서 '퇴보적'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런 이유로 빈의 공공주택은 한동안 역사의 평가에서 소외되거나 폄하됐다. 근대건축의 물 결속에서 빈의 집합주택은 '이단적이고 절충적인 모델로 평가됐다. 근대건축의 이론적 전도사를 자처했던 지크프리트 기디온 Sigrid Giedion 은 자신의 대표작 『공간, 시간, 건축 Space, Time and Architecture」(1959)에서 빈의 공공주택에 대해서는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 존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또한 이후 미국에서는 소련을 적대시하는 정치적 배경 때문에 빈의 모델을 계속해서 평가 절하했다. 건축적 내용보다 정치적 배경이 더욱 주목받은 것이다. 미국의 건축비평가 헨리 러셀 히치콕 Henry-Russell Hitchcock은 『건축: 십구 세기와 이십 세기 Architectur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1958)에서 빈의 공공주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처음부터 그것의 의미는 건축적 측면보다 정치 사회적 측면에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건축 혁명이 발생한 시점에 새로운 세대가 아닌 건축가들에 의해서 예기치 않게 지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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