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 독일 정부가 제정한 새로운 척도체계UNI
전시회는 1957년 7월에 개막했다. 유달리 무더웠던 그해 여름 140만 명의 인파가 전시회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독일이 문화 선진국이라는 자긍심에 도취하였고, 자신들이 미래에 거주할 새로운 주거환경을 경이로운 눈으로 감상했다. 한자지구에는 모두 1,160호의 주택이 건축되었다. 전시회가 열린 시점인 1957년에는 601호만이 건설되었고 나머지는 1960년까지 건설되었다. 고층 및 중층 아파트, 연립주택, 그리고 단독주택 등 현대도시가 요구하는 주거 형식이 모두 망라되었다. 도판 4 15개국에서 53명의 건축가가 초대되었는데'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 브라질의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Oscar Niemeyer, 핀란드의 아르바이트 알토 Alvar Aalto, 미국 국적의 그로피우스, 덴마크의 아는 야곱 센 Arne Jacobsen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런데 부지에 들어선 건물들은 일관성과 통일성이 결 여되 어 있었다. 바이세요 호프 주택전시회의 경우는 미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모든 참여 건축가들에게 계획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일련의 원칙을 제시했고, 그 결과 다양성과 통일성이 모두 달성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인터바우의 경우 건축가들은 큰 간섭 없이 자유롭게 건물을 계획했다. 특히 외국에서 초빙된 건축가들은 각자 자국에서 일을 했으므로 그 내용이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한자지구에 들어선 여섯 동의 탑상형 아파트는 높이를 17층과 18층으로 통일했지만 색채, 창의 패턴 등은 모두 달랐다. 이러한 양상은 지구의 중앙에 자리한 8, 9층 규모의 널빤지꼴형 아파트들도 마찬가지였고, 연립주택 및 단 독주 책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전시회장은 보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건축 이론가 레오나르도 베네 볼로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했다. 즉 한자지구라는 제한된 장소에 성격이 서로 다른 건물들을 병치시킴으로써 미래의 주거환경이 지닐 다양한 양상을 미리 보여 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인위적인 통일을 이루기보다는 건축가들에게 다양한 시도를 허용하여 서로 간의 비교를 유도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힘에 맡기는 성숙한 방식 알토, 그로피우스, 니에메예르의 아파트, 그리고 한자지구 밖에 지어진 르코르뷔지에의 위기네 등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그중 외관이 가장 특이한 건물은 그로피우스가 계획한 9층 높이의 널빤지꼴형 아파트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남쪽의 공원을 면하고 있다. 도판 5 건축가는 난간 에도 곡선의 모티프를 적용했고, 전면의 난간은 철판 위에 에나멜로 마감해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었다. 니에메예르가 계획한 8층 규모의 아파트는 하부에 V자형의 필로티를 연속으로 세웠다. 건축가가 그의 정신적인 아버지 르코르뷔지에의 위니 테를 좋아한 덕분이다. 그는 건물 본채와 분리해서 엘리베이터를 위한 서비스 타워를 세웠다. 그런데 타워와 본채 건물을 5층과 7층에서만 갑판으로 연결한 탓에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대신 주로 계단을 이용했다. 도판 6 주민들은 “엘리베이터 하나 제대로 설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시(브라질리아)는 어떻게 건설했냐”면서 건축가를 비난했다고 한다. 르코르뷔지에도 전시회에 초청받았다. 마르세유에 위니 테를 막 완성한 그로서는 베를린에 또 하나의 위니 테를 지을 기회를 얻었다. 건물이 돋보이기를 원했던 르코르뷔지에는 위니 테가 들어가기에는 한자지구의 부지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장소를 요구했다. 준비위원회는 올림픽 스타디움 옆의 전망 좋은 용지를 마련해 주었다. 7 그런데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르코르뷔지에는 베를린 위니 테를 자신의 작업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도 그랬다. 그가 이 건물을 인정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위니 테의 핵심인 모될로르 시스템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공을 책임졌던 독일의 건설회사는 모 될로르 대신 독일 정부가 제정한 새로운 척도체계UNI를 적용했다. 당시 독일은 자재 부족으로 건설산업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건설장비도 부족했으므로 각종 건설공사는 노동력에 의존하면서 날림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정부에서는 표준적인 척도체계를 제정해 고, 모든 건물에 사용할 것을 규정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부터 모될로르 시스템이 적용된 계획안을 독일에 전달했다. 그런데 독일의 건설회사는 모 될로르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부에서도 새로운 체계에 따라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안을 변경해 버렸다. 건물은 층마다 높이가 1미터씩 높아졌고, 인간적 슬 케일이 사라지면서 수평선을 따라 퍼지는 마르세유 위니 역동성을 여기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건설의 중 간 단계에서야 베를린을 방문한 르코르뷔지에는 현장을 보고 격분했다. 결국 중간층 이상에는 모될로르 시스템이 적용되었지만 수습할 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건물에는 상업시설이 마련되지 않았고, 주민들의 체력단련 과 커뮤니티를 위한 시설이 있어야 할 옥상정원도 없다. 르코르뷔지에는 강력히 원했지만 반 양 되지 못했다. 그런데 베를린 위니 테의 주민들은 이 건물을 상당히 좋아했다. 르코르뷔지에 는 '무지한 독일인이 잘못 지어진 위니 테에 만족한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