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 새로운 이념의 범세계적 확산
퍼진 새로운 주거환경의 이념 새로운 주거환경의 이념은 광범위하게 퍼지었다. 국제주의 양식'으로 대변되는 근대건축의 이념은 모든 건축물에 해당하였지만 집합주택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환경이 그 몸통을 이루었다. 새로운 주거환경의 이념은 당연히 새로운 도시계획이라는 수단을 전제로 했다.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에서는 도시개발과 주택건설사업에 새로운 이념을 적용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고, 사용자로서는 어둡고, 불결하고, 불편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바야흐로 인류는 천 년 이상이 어 오던 무겁고 칙칙한 주거환경을 버리고 밝고, 깨끗하고, 푸르른 주거환경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판 새로운 이념은 우선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으로, 동쪽으로는 구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로, 그리고 남쪽으로 는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 곳곳으로 퍼지었다. 미국은 동부와 서부가 다소다. 든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새로운 주거환경의 확산에 있어서 또 다른 중심이 되었다. 도시와 주거환경에 대한 새로운 이념은 유럽과 미국을 넘어서 제삼세계로 전파되었다. 인도의 찬디가르와 브라질의 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실험적 도시게 획이 전개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운 주거환경의 이념은 동남아시아와 극동에까지 전해졌다. 홍콩, 싱가포르,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그 파도가 밀려왔다. 1957년의 주택전시회 '인턴 바울, 1920~1930년대 즉 '순수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에도 변화의 진원지는 독일이었다. 패전국가로 재정은 파탄 나고 국가의 위신은 추락했지만 주거문화의 최전선을 형성했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놀랍게도 대규모 주택전시회를 개최했다. 바로 1957년 베를린의 한자지구 Hansaviertel에서 열린 「인터바우Interbau 여다. '내일의 도시 Stab Von Morgen’을 표방한 이 전시회는 독일에서 개최된 두 번째 국제적인 주택전시회로서, 192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바이세요 호프 주택전시회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전시회의 포괄적인 목적은 새롭고 민주화된 서독을 세계 각국에 알리려는 것'이었지만, 건축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근대건축을 이끌었던 혁신적 건축가들의 이념을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시주거의 모델을 범세계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인턴 바우데는 정치적인 목적도 다분히 있었다. 분단된 냉전체제에서 동·서독의 경쟁은 치열했다.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경쟁에서는 동독이 빨랐다. 냉전체제가 시작되자마자 동베를린에서는 스탈린 가 Stalin ale, 현 카를 마르크스 알에를 따라서 신고전주의 양식의 장중한 아파트를 줄지어서 건설했다. 마치 구소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Leningrad,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를 옮겨 놓은 모습의 새로운 주 거지는 '노동자들의 궁전'을 표방한 것이었다. 도판 2 서베를린도 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좀 더 획 기적인 수단을 통해서 동독을 누르려고 했는데, 그 결과가 주택전시회 '인턴 바울'였다. 서독 정부가 노린 것은 동독에 대한 우위만은 아니었다. 비록 패전국이지만 독일은 근대건축의 선구적 국가였고 주거문화 개혁의 최전선에 있던 국가였다. 문화적 위상을 다시 찾아야 했던 독일은 자국의 건축 수준을 서방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다. 패전으로 의기소침한 국민의 사기와 자긍심을 높이려는 목적도 당연히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독일에는 선두에서 사업을 이끌 만한 건축가가 없었다. 미스와 그로피우스는 도미 渡美 후 미국 시민이 되었고, 브루노 타우트와 에른스트 많이 같은 사람도 없었다. 애써 꼽는다면 한시 샤론 정도가 당시 독일을 대표하는 건축가였다. 결국 의회에서는 현상설계를 통해서 전시회장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도록 결정했다. 그 결과 일리 크로이어 Wily Breuer와 게르하르트 옵스트 Gerhard Joist 가 제시한 계획안이 채택되었다. 도판 3 계획안은 당연히 그 코 르뷔지에의 도시이념을 전폭 수용한 것으로서, 전시회의 신조인 '내일의 도시'에 그대로 부합했다. 풍부한 녹지 위에 고 층 주택 위주로 건물을 배치해 대지건물비율은 최소화하면서 밀도는 충분히 확보하는 내용이었다. 전시회 준비위원회는 여러 번의 토의를 거쳐 1954년에 마스터플랜의 수정안을 확정했다. 잘 짜인 원래 계획과는 달리 수정안은 부지 여기저기에 건물들이 자유롭게 자리하는 다소 혼란스러운 계획안 이어 베를린시는 전시회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본 한자지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지구의 중심인 한자광장 Hansaplatz에는 지하철역이 들어섰고, 주변에는 쇼핑센터, 영화관, 도서관, 유치원, 교회 등이 건축되었다. 미국 국무부에서 는 인터바우를 기념하여 특별한 건물을 한 동 기증했다. 미국 건축가 휴 스터빈스Hugh Stubbing이 계획한 '콩그레스 홀 Korgresshalle'로 오늘날은 '세계문화관 Haul der Kultur en der Wet'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3년 케네디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서베를린은 나의 고향'이라는 연설을 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